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일본군의 호승심과 촉박한 시간 ===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의 황당한 승리, 그리고 조선 함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엄청났다. 당사자인 [[도도 다카토라]] 본인이 현장에서 13척의 함대를 보고 제장이 승리를 확신하고 격파하기로 합의를 보고 달려들었다고 했을 정도다. 정유재란(2차 침략)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병력들까지 가세했으므로, 이러한 자신감은 더욱 확고해져서 조선을 최대한 가뿐하게 밟아주겠다는 호승심에 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가끔 돌아다니는 '진도 우회 떡밥'도 여기에서 나온다. 어째서 일본군이 [[진도군]] 남쪽으로 우회하지 않고 명량이란 좁은 통로로 왜 굳이 들어왔냐는 떡밥인데, '''당시 일본 수군의 입장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판옥선이 일본의 배보다 스팩이 우월하다지만 13척과 300척은 20배도 넘는 압도적인 물량차가 있으니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심지어 그 13척에 타고 있는 병사들도 전부 직전 전투에서 지근지근 밟아준 상대들이다. 이 쉬워보이는 먹잇감을 두고, 그동안 처참하게 당해왔던 이순신이 가장 약해졌을 때 복수할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다른 길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수군으로선 울돌목에서의 전면전을 피하려 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날짜는 양력으로 10월 말, 곧 겨울로 향하고 있었고 한양을 노리던 육군은 [[직산 전투]]에서 격퇴당해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수군이 더 이상 지체하면 육군은 보급 문제로 인해 한양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빠른 시간 내에 서해로 진입해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목표였다. 아무리 상대가 그 무서웠던 이순신이라지만 '''고작 판옥선 13척을 정면으로 싸울 자신이 없어서''' 진도를 돌아 가거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기습 공격을 가해서 전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방법을 써가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도 외해로 돌아가는 길 또한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진도 외해의 바닷길인 장죽수도, [[맹골수도]] 역시 울돌목 만큼이나 험한 물목이고 곳곳에 암초와 섬들이 널려 있다.[* 여기는 온갖 최첨단 선박들이 돌아다니는 현대에도 연 평균 4회 ~ 5회 선박 조난 사고가 일어나는 험한 곳인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바로 여기서 발생했다.] 게다가 이 섬들 사이에서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조선 수군의 기습도 고려해야 했다. 이순신 함대를 놔두고 섣불리 북상했다가는 후방 기습을 당해 단체로 털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당장 서해에는 왜군이 점령한 항구나 보급 기점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명량수도에 보기좋게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정면으로 밀고 나가서 최단 거리인 울돌목을 빠르게 돌파하는 [[정공법]]이 당시 일본 수군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방심해서 무지성 돌격을 한 것도 아니고 남은 적선이 13척인 걸 알아낸 뒤 일부러 13척만 정찰을 보내 사기도 꺾고, 해류가 거친 명량에서 싸울 것 같자 그런 해류에 익숙한 구루시마를 선봉으로 내세우는 등 전략 준비도 철저히 했다. 상대가 [[이순신|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전략 병기]]가 아닌 이상 승리가 보장된 셈이었다. 한 마디로 일본군 최고의 불운은 그 '''[[이순신|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전략 병기]]가 하필 자신들의 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